月刊 아이러브 PC방 6월호(통권 391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충남 논산시청 중앙로 인근에는 22년 동안 한곳에서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PC방이 하나 있다. 정부가 발표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PC방은 한번 가게 문을 열면 4년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는다고 하니 이 매장은 평균보다 5배 이상의 생명력을 갖춘 PC방인 셈이다.

‘스타크래프트’의 웅대한 첫걸음, ‘뮤온라인’에서 ‘아이온’으로 이어지는 MMORPG 전성시대, 그리고 현재의 ‘리그오브레전드’ 천하통일까지 PC방 대세 게임의 흥망성쇠를 강산이 두 번 넘게 변하는 세월 동안 모두 지켜봤다. 또한, 지포스와 라데온의 신경전, 인텔과 AMD의 각축전, 온갖 게이밍 기어의 난타전이 바로 이 PC방에서 치러졌다.

이 PC방이 경험한 것은 대세 온라인게임이나 세대를 거듭하며 발전한 컴퓨터 제품의 변화 외에도 더 있다. 밀레니엄 시대를 시작하는 설렘부터 코로나 시대의 절망에 이르기까지 주변에서 명멸하는 크고 작은 PC방들도 지켜봤다.

에버넷PC방. PC방이라는 업종을 시작부터 지금까지 온전히 경험해봤다 할 매장의 이름이다.

외구내신(外舊內新)의 반전! 작은 매장에 눌러 담은 알찬 실속
논산시 한적한 도로변 3층 건물이 에버넷PC방의 보금자리다. 목재로 꾸며진 아웃테리어와 1층 매장이라는 특징 그리고 ‘에버넷PC’라는 간판은 어느 한 지방 소도시 어린이 공부방 같은 모습이지만 자동문이 열리고 펼쳐진 세상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타임머신을 타고 10년 전, 20년 전으로 가고 싶다면 에버넷PC방으로 가면 된다. 전면금연 정책이 시행되기 이전에 흔하게 만나볼 수 있었던 그런 PC방의 향수를 강하게 불러일으킨다. 시스템 책상도 없고, 모니터 아래 사운드바도 덩그러니 놓여있다. 매장 크기는 133㎡(40평)에 불과하고 PC도 52대뿐인, 요즘은 보기 힘든 소형 매장이다.

소형 매장의 선불결제기 디스플레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여백의 미
소형 매장의 선불결제기 디스플레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여백의 미

PC방 업주와 알바생들의 공간인 카운터 역시 그 시절 모습 그대로 단출하기 그지없다. 거대하고 으리으리한 주방은 고사하고, 매장 관리용 PC와 싱크대가 전부다. 냉장고 1대와 카운터 사이에는 과자와 스낵이 겨우 자리를 잡았다.

여기까지만 보면 다 쓰러져가는 시골 매장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큰돈을 들인 대형 매장도 1년을 못 버티는 업종이 PC방이다. 22년 동안 이 매장이 영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저력은 분명 있었다.

괜시리 반갑게 느껴지는 옛날식 PC방 카운터 
괜시리 반갑게 느껴지는 옛날식 PC방 카운터 

에버넷PC방은 매장 곳곳에 업주의 손길이 묻어난다. 컴퓨터를 포함한 전자기기 전반에 관심이 많은 업주는 PC 시스템의 조립과 세팅은 물론 CCTV까지 직접 설치한다. 심지어 바탕화면 런처까지 직접 만들어서 쓸 정도다. 매장 인테리어도 많은 부분을 직접 시공했으며, 선반은 주문 제작했다. 내 매장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가겠다는 생각에서다.

매장의 분위기와 겉모습은 옛것이나, 속을 들여다보면 새것이다. 지난 1월에는 거금을 들여 PC 업그레이드도 직접 했다. CPU는 13세대 인텔 코어 i5-13400F, RAM 32GB, 그래픽카드는 엔비디아 지포스 RTX3070Ti로 대도시의 그 어느 매장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PC방 업종의 전성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듯한 분위기
PC방 업종의 전성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듯한 분위기

많지 않은 좌석이지만 다양한 크기와 사양의 LG 모니터가 도열해있고, 경쾌한 타건감의 이메이크 기계식 키보드, 하얗게 빛나는 로지텍 마우스, 흠집 하나 없는 앱코 헤드셋, 새것처럼 멀쩡한 사장님 의자들이 에버넷PC방의 반전 매력을 드러낸다.

PC방의 모습과 닮은 PC방의 업주 PC방 손님은 결코 청소년이 다가 아니야
작지만 옹골찬 에버넷PC방은 장진영 사장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PC방 업계의 대세였던 대형화를 거부하고, 쾌적한 게이밍 환경을 위한 PC 시스템 구축에 매진했다. PC방 PC에 대한 열정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PC 전문점 에버넷PC로 시작해 PC 30대 규모의 초소형 PC방을 거쳐 확장공사를 통해 지금의 에버넷PC방으로 거듭날 동안 내공이 쌓였다. 또 이런 내공은 한 명의 PC방 업주를 프로게이머 지망생들의 PC 세팅과 PC방 바탕화면 런처 제작 및 배포 등 다양한 활동으로 이끌었다. 매장 관리자를 채용해 모든 것을 일임하고 수금만을 원하는 업주는 갈 수 없는 길이다.

2023년 PC방의 먹거리 메뉴판치고는 품목이 조촐하다 
2023년 PC방의 먹거리 메뉴판치고는 품목이 조촐하다 

그의 이런 이력은 “손님들이 찾아올 수밖에 없는 PC 환경을 갖춰 영업하는 것이 PC방이고, 맛있는 음식을 조리해 판매하는 업종은 식당”이라는 주장을 이해케 한다. 그는 “우리 매장은 음식 장사는 안 할 거다. 먹거리를 강조하는 PC방 업주들이라면 이런 말이 듣기 싫을 수도 있다”면서도 “PC방이 PC로 장사하지 않고 자꾸 음식으로 가는 세태가 싫다”고 말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외부음식 반입으로 손님과 드잡이질할 이유도 없고, 식품위생 단속으로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다. 과도한 조리 업무를 이유로 그만두는 매장관리자 때문에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편, 에버넷PC방은 ‘PC방 업종은 철저하게 동네 장사’라고 주장한다. 연무대의 상징성 때문에 논산시 방문객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매장으로 여길 수 있지만 가당치도 않다. 연무대와 논산시청의 거리는 직선거리로 8km에 이른다.

오후 2시 지방 PC방의 한가로운 실내 모습
오후 2시 지방 PC방의 한가로운 실내 모습

에버넷PC방은 신병훈련소 입소생과 관계자들은 전무하고 택시기사와 택배기사들의 휴식처 같은 역할이 더 특징이다. 장진영 사장은 “이런 손님들 때문에 리니지와 아이온의 점유율이 높고, 동네 어르신들이 고스톱이나 포커를 이유로 자주 방문하시는 것도 우리 매장의 개성이라면 개성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이유로 전국 여느 PC방과 마찬가지로 ‘리그오브레전드’의 점유율이 높기는 하지만 평균에는 한참 못 미친다. 또한, 논산시도 여타 지방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청소년들의 인구가 눈에 띄게 줄었기 때문에 젊은 층에서 인기가 많다는 게임들이 에버넷PC방에서는 맥을 못 춘다고 한다.

예의 없고 시끌벅적한 10대 청소년 손님을 응대하는 것이 영 불편했다는 장진영 사장은 수년 전부터 성인 손님을 겨냥해 매장을 운영해왔다. 실제로 수요일 오후 2시에 방문한 매장에는 8명의 성인 손님이 ‘아이온’ 등 MMORPG를 플레이하고 있었다.

화장실 내부도 매우 청결했지만 손님이 사용 중이라 카메라에 담을 순 없었다
화장실 내부도 매우 청결했지만 손님이 사용 중이라 카메라에 담을 순 없었다

코로나는 전대미문의 사태 PC방은 사장의 관심과 돌봄 이상이 필요해
빠르게 변해가는 게임시장 상황과 위태롭게 느껴지는 업소 감소추세 속에서도 에버넷PC방은 자신만의 색깔을 또렷하게 내비치고 있다. 시간당 1,500원, 비회원 2,000원이라는 요금은 이를 증명했고, 인근에 있던 5개의 매장들이 현재는 1개로 줄었지만 에버넷PC방은 건재하다.

그러나 에버넷PC방도 무수히 많은 위기를 맞이했다. 장진영 사장은 “나는 PC방 업주가 자주 PC방에 출근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알바생이 있든 없든 상관 없다”라며 “현장을 중요시하고 손님들과 소통하는 업주가 아니었다면 22년 동안 PC방을 계속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왕년의 잘나가던 PC방 업주들의 필수템, 블리자드 감사패는 과거의 영광을 말해준다
왕년의 잘나가던 PC방 업주들의 필수템, 블리자드 감사패는 과거의 영광을 말해준다

이런 마음가짐의 업주가 운영하는 에버넷PC방도 역대 위기들 중에서 코로나 사태가 가장 타격이 컸다고 한다. 알뜰살뜰 가꿔온 매장이 정부의 집합금지 조치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고, 에버넷PC방은 폐업을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로 몰렸다. 이렇게 고심하는 사이 많은 동료 PC방 업주들이 먼저 업계를 떠났다.

전대미문의 충격에 에버넷PC방도 야간 영업을 처음으로 포기하게 됐다. 텅 빈 매장에 앉아 있노라면 평소 흡연실을 험하게 사용해 날카로운 문구로 경고해야 했던 성인 손님들이 그리워질 정도였다. 이에 2000년대 초반 시절의 북적이던 매장을 다시 만들고 싶어졌다.

흡연자 손님들 때문에 PC방 업주가 받은 스트레스를 엿볼 수 있다
흡연자 손님들 때문에 PC방 업주가 받은 스트레스를 엿볼 수 있다

그는 “내가 PC방을 접지 않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마누라 때문이다. 빠듯한 2교대 체제 때문에 볼멘소리를 하던 아내가 사실은 나보다 더 PC방에 애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고된 청소 업무를 도맡는 아내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PC방 업계가 코로나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규제 일변도에서 벗어나야 하고, 게임사들도 지피방 단속과 파급력 있는 PC방 이벤트를 기획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업주 개인이나 업계 내부의 역량으로 해결할 충격이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이 둘의 도움 없이는 이런 바람이 현실이 되는 일은 어려울 것이라 전망하기도 했다.

장진영 사장은 “갓난아이를 둔 젊은 아빠가 PC방 업주로 22년을 살다 보니 이제는 완전히 아저씨가 됐다. PC방 운영이 온라인게임보다 재밌었지만, 이제는 예전만 못하다. 젊은 PC방 업주들의 약동하는 활약을 기대한다”는 술회로 인사를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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