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刊 아이러브 PC방 6월호(통권 391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온라인게임 속 PK 콘텐츠에서 다양한 스킬을 보유한 캐릭터는 활용도가 높다. 반대로 경직된 스킬셋을 가진 캐릭터는 게임 서비스가 지속되고 업데이트가 진행될수록 한계에 봉착한다. 이 캐릭터만 육성한 게이머는 반드시 고배를 마시게 된다.

같은 논리로 입맛이 까탈스럽지 않은 사람은 편식하지 않게 되고, 결과적으로 균형 잡힌 영양상태를 갖출 공산이 크다. 반대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지만, 입에 넣을 음식을 이런저런 이유로 거부하는 사람은 예비 아사자다.

생태 박사님들이 다양성 타령하는 이유
본래 다양성은 생물학자들이 사용하던 개념이었다. 생태계를 구성하는 생물들이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각자가 저마다의 역할을 하게 되고, 이 역할들이 유기적으로 맞물리면서 균형을 갖추게 된다. 온갖 종류의 생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생태계는 건강한 상태를 자연스럽게 찾아갈 수 있다는 논리다.

미국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의 늑대 복원 프로젝트는 이 분야의 걸작이다. 포식자 역할을 담당하던 늑대가 전부 사살되면서 국립공원 생태계는 초식동물인 말코손바닥사슴의 천국이 되었고 공원의 풀과 나무에게는 지옥과 같은 환경이 형성됐다.

이후 국립공원의 생태적 건강 척도는 자연적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수준까지 추락했는데, 늑대를 다시 들여다 놓으면서 생태적 다양성을 보강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국립공원은 거짓말처럼 생기를 되찾았다.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의 늑대 복원 프로젝트에 참여한 야생 생태학자 더그 스미스 수석 박사는 “우리 인간이 아니면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소감을 밝혔다. 함부로 다양성을 훼손한 인간에 대한 경악인지, 과오를 바로잡는 노력과 감동적인 성과에 대한 전율인지는 모를 일이다.

어떤 생물학자들은 이 다양성을 생태계가 아니라 유전자 차원에서 다루기도 한다. 유전적 다양성은 한 생물종의 유전적 구성에서 유전적 특징을 모두 합한 것으로, 진화적 측면에서 다양성은 어떤 생물이 환경변화에 적응할 수 있게 한다.

학자들은 전염병도 일종의 환경변화로 정의한다. 전염병으로 멸종 직전에 몰린 생물 중에는 바나나 그로미셸도 있다. 다양한 품종의 바나나 중에서도 그로미셸은 진한 맛과 높은 당도 그리고 풍부한 향으로 최고의 바나나로 꼽힌다. 미식가들에게는 이 환경변화가 영 달갑지 않다.

그로미셸은 바나나계의 코로나19라고 할 수 있는 파나마병에 대처할 유전적 다양성을 갖추지 못한 까닭에 1960년대 전 지구적 규모의 집단폐사를 경험했다. 글로벌 유통채널들도 그로미셸 운송을 꺼리게 됐다. 덕분에 우리는 맛없는 캐번디시 바나나를 바나나로 알고 먹는 처지가 됐다.

제일 오래 살았으면서 돈까지? 새삼 넥슨 대단하네~
지난달에는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게임사들의 실적발표가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게임사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는 단위로 매출과 영업이익을 자랑했고, 타 업종 사람들을 배 아프게 만드는 임금인상 소식을 축포처럼 쏘아올렸다.

그런데 올해는 반전이 있었다. 넥슨을 제외하면 모두가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적자행진을 이어가거나 가까스로 적자를 면한 예가 태반이었다. 또 어떤 회사는 매출이 거대했지만 영업손실이 나서 실속이 없었다.

이런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넥슨만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올해 1분기 매출은 1조1,920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6% 증가했고, 영업이익 역시 46% 증가한 5,606억 원이었다. 분기 최대 실적이었다.

넥슨의 돈주머니를 보고 있자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단순히 두둑해서라기보다 다채로운 구성의 매출원 때문이다. 국내와 해외를 가리지 않고, PC와 모바일 플랫폼을 가리지 않고, 개발과 유통을 가리지 않고, 신작과 구작을 가리지 않았다. 게임 라인업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그 소재와 장르의 스펙트럼도 넓은 수준이 아니라 광활할 지경이다.

아주 오래 전 ‘바람의나라’를 내놓은 넥슨은 ‘스타크래프트’의 블리자드보다 PC방 선배로, 세상 그 어떤 게임사보다 PC방 짬밥을 많이 먹었다. 그런데도 쉰내 나는 늙다리가 되기는커녕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로 타 게임사들을 애송이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넥슨은 PC방에 데뷔한 초창기부터 개성적인 총천연색 게임들을 선보여왔다. 오히려 게임사들이 너도나도 쏟아내기 시작한, 그 흔한 리니지라이크 모바일게임이 없다는 사실이 의아할 정도다.

최근 몇 년 사이 모바일게임 시장이 단 한 종류의 아류작들로 점철되기 시작하면서 생태계가 경직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이전부터 맹독성 과금에 대한 게이머들의 염증이 팽배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1분기 실적발표를 일종의 생태적 위험신호라고 해석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LoL이 장악한 점유율, 극복의 대상으로 인식해야
이렇다 보니 다양성이 돋보이는 넥슨의 게임 타이틀 라인업은 생존 유전자의 표현형처럼 비쳐진다. 넥슨이 다채로운 라인업으로 성공적인 생존 신고가 가능했다면 PC방도 모종의 다양화를 통해 생존을 도모할 수 있다.

‘리그오브레전드’가 혼자서 점유율 40%를 넘기는 인기 게임이라는 사실은 PC방 집객에 검증된 카드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라이엇게임즈의 서버 상태가 불량할 때마다 덩달아 PC방도 고객 서비스 상태가 불량해진다. 불량한 서버 상태로 인해 평가가 하락하는 것은 라이엇게임즈 하나로 족해야 한다.

지난 연휴 때 ‘리그오브레전드’의 PC방 사용량은 폭증했다. 평일에 140만 시간에 머물던 일간 사용량이 260만 시간까지 뛰었다. 그러나 점유율은 평소 43%를 기록하던 것이 36%까지 주저앉았다. 이게 뭔 일인가 싶지만 잠깐만 생각해보면 PC방 비인기 게임들이 크게 선전해서 나온 결과임을 알 수 있다.

‘리그오브레전드’ 유저가 아닌 인구 중에서 평소에 PC방을 찾지 않는 사람들 규모가 크고, 이들의 게임 취향이나 PC방을 꺼리는 이유를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연휴를 맞아 기분이 내켰는지 실로 오랜만에 PC방을 방문했다.

PC방 업종의 전성기는 ‘리그오브레전드’가 지배하는 지금은 당연히 아니고 ‘스타크래프트’가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때도 아니다. 오히려 ‘스타크래프트’의 인기가 조금 시들해졌을 무렵인 2008년 정도로 회자된다. ‘카트라이더’가 흥행하면서 PC방은 데이트코스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고, 별의별 MMORPG가 PC방 인기 순위에 이름을 올렸던 때다.

이 당시에는 PC방 점유율 10% 초반만 찍어도 전체순위 1위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게임 하나가 서버를 제대로 관리 못 한다? PC방 게임의 다양성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과거에는 PC방 업주의 하루 장사에 큰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사장님! 롤 접속 안 돼요!” 소리에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었다.

위닝일레븐 시리즈가 게이머들에게 인기를 잃자 콘텐츠를 의존했던 플스방도 사라졌다   
위닝일레븐 시리즈가 게이머들에게 인기를 잃자 콘텐츠를 의존했던 플스방도 사라졌다   

PC방이 인기 게임이라고 불러줄 만한 게임을 다양하게 갖출 수 있다면, 지난 연휴의 양상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면 그리운 전성기를 다시금 핥을 수 있다. 이미 약 20년 전 기억 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플스방은 위닝방이라는 경직된 유전자를 극복하지 못해 사라졌음을 유념해야 한다. 롤방을 향하는 작금의 질주에 제동을 걸 수 없다면 멸종 시한부 그로미셸 바나나 신세를 피할 수 없다.

PC방 생태계에 포효할 늑대 한 마리 보고 싶다
끝장나게 재밌는 게임을 게임사가 출시하면 PC방도 좀 나아질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런데 기대에는 못 미칠 것이다. 이 게임을 굳이 PC방에서 할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가 어려워서다.

웹서핑을 하다가 종종 볼 수 있는 해외 PC방들의 사진들을 보면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다. 한국과 완전히 다른 개성을 느낄 수 있어서다. 일본의 넷카페는 개인적 프라이버시를 최대한 보장하는 형태로 이용률이 높고, 미국 PC방은 자유로운 랜파티 느낌이 묻어나기도 한다. 한국 PC방들 중에도 개성적인 특징과 독자적인 분위기를 갖춘 매장이 있지만, 천편일률적인 경향을 부정하긴 힘들다.

물론 원인은 나랏님이 제공하시긴 했다. 청소년 일탈을 들먹이며 프라이빗한 공간 구성은 물론, 아주 낮은 칸막이로 구분한 커플석마저 불법으로 규정하며 업태의 경직에 일조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게이머와 손님들의 니즈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데, PC방은 아직도 1998년식 매장 구성에 머물러 있다.

기껏해야 조명을 밝게 하고, 흡연실을 만들라고 하니까 만든 것이 전부다. 물론 이 업계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은 이것이 작은 변화가 아님을 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냉정한 평가를 내릴 뿐이다.

라이엇게임즈가 아닌 게임사들이 잘 먹고 잘사는 이유는 그들만의 독자적 콘텐츠가 있어서다. PC방도 이 매장이 아니면 안 되는 독자적인 경험을 손님들에게 제공한다면 잘 먹고 잘살 수 있다.

늑대는 개와 다르다. 인간이 주는 먹이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사냥한다. 집객을 대박 게임에 기대지 않는 것이다. 무리가 힘을 합쳐 거대한 곰도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다. 업주들이 힘을 합쳐 규제 정책에 맞서 싸우지 않고는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

배가 고프면 손님 사냥에 나서고, 온갖 방법을 시도하는 늑대가 PC방 생태계에 등장하길 바란다. 황폐해진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이 다시 살아난 것처럼 야성을 간직한 한 마리 짐승 같은 PC방이 PC방 업계 전체를 살아나게 할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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