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刊 아이러브PC방 10월호(통권 359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디스코엘리시움>은 비디오 게임 팬들이 수년간 알아온 사실, 즉 그 매체가 강력한 힘을 가졌으며 TV나 소설은 할 수 없는 독특한 이야기를 말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 게임은 모든 비디오게임이 예술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 MATTHEW GAULT, ‘TIME지 선정 2010년대 최고의 비디오 게임 10선 中

RPG 장르의 역사는 어떻게 플레이어가 스토리에 몰입하게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가장 자주 쓰이는 방법은 플레이어에게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인데, 이는 비디오게임의 ‘인터렉티브 미디어’로서의 특징을 가장 잘 살리는 방법이기도 하다. 플레이어에게 직접 스토리 진행에 참여할 기회를 줌으로써 자신이 직접 게임을 제어하고 있다고 느끼고 더 나아가 주인공 캐릭터를 자신의 분신으로 여기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플레이어에게 보다 많은 선택 기회를 제공하고 그 선택에 대해 확실한 결과를 보여주는 것은 RPG 게임의 ‘몰입감’을 확실하게 올려줄 수 있다는 뜻이다. 게이머들은 이러한 요소를 ‘선택과 결과’ 라고 부르며 게임의 재미를 결정짓는 요소 중 하나로 본다. 최소한 오늘날의 RPG 장르에서 ‘선택과 결과’는 게임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 셈이다.

에스토니아의 인디 게임개발사 ‘ZA/UM’이 수년에 걸쳐 개발한 <디스코엘리시움>은 이 ‘선택과 결과’라는 요소를 그동안 없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디스코엘리시움>의 ‘선택’은 캐릭터 메이킹 단계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단계에서 플레이어는 주인공의 지닌 네 개의 능력치와 24개의 스킬을 각각 조절할 수 있으며, 이 선택이 차후 이어질 게임플레이를 지배한다. <디스코엘리시움>은 <폴아웃>시리즈와는 달리 어떤 상황에서 선택지를 제시할 때 현재 플레이어가 고를 수 없는 선택지는 알려주지 않는데, 예컨대 “매력이 부족해 이 선택지는 고를 수 없음”이라는 경고문을 띄우는 대신 아예 선택지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이는 ‘캐릭터 메이킹’이라는 선택에 대한 결과가 ‘게이밍 경험’으로서 드러난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게임의 모든 부분을 즐기기 위해서는 서로 다르게 생성된 주인공으로 게임을 여러 번에 걸쳐 반복해서 플레이해야 한다는 의미다. 심지어 같은 능력치를 지닌 캐릭터라고 해도 게임 내의 선택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말 그대로 ‘게임의 모든 것’을 파고들기 위해서는 정말 수없이 많은 반복 플레이가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이 여전히 재미있다는 사실은 이 게임의 스토리적 완성도에 대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게임에서 이뤄지는 모든 ‘시도’는 주사위 판정을 통해 결정되며,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추가적인 보너스를 얻을 수도 있다. 예컨대 권총을 발사하는 선택지에서 ‘성공’은 명중, ‘실패’는 빗나감을 의미하는데, 발사하기 전에 주변에 방해가 될 만한 것들을 미리 제거하는 선택을 했을 경우 명중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식이다. 이 ‘시도’는 실패해도 나중에 다시 해볼 수 있는 것과, 한 번 도전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나뉜다.

이 ‘돌이킬 수 없는 시도’의 특징은 성공과 실패 어느 쪽이든 ‘확실한 결과’가 따라온다는 것이다. 사실 이 단어에도 함정이 있는데, 이 게임에서 ‘성공’과 ‘실패’는 자신이 지금 시도하는 행위의 결과만을 말해줄 뿐 그 행위가 가져올 결과가 이로울지 해로울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비유하자면 ‘독사 구덩이에 뛰어드는 행위의 성공’은 좋은 결과라고 말하기 힘들다.

성공과 실패에 대한 확실한 피드백이 있으면서 그 행위가 종극에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모른다는 사실, 그럼에도 동시에 ‘분명한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플레이어가 성공할 때까지 저장데이터를 불러오는 대신 게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납득하고 성패 여부와 무관하게 게임을 진행하게 해주는 동기를 제공한다.

게임의 스토리는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 당장 자신에게 닥쳐오는 일들을 해결하고 자신의 과거에 대해 알아가는 내용이다. ‘기억 상실’은 게임에서 이제 딱히 새로울 것이 없는 소재지만, ‘ZA/UM’은 흙에서 도자기를 빚어내듯 이 소재를 통해 게임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사실 게임 스토리에 대해서는 이 이외에 크게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더 정확하게는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 게임의 스토리에 대해 설명하는 것 자체가 게임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공식 트레일러조차 보지 않은 채로, 게임에 대한 정보를 전혀 모른 상태로 플레이하기를 권한다. 이 게임은 처음 실행하고 첫 물체와 상호작용 하는 순간부터 놀라움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스토리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한글화는 매우 훌륭한 편이다. 97만 단어에 이르는 방대한 텍스트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한글화 작업의 주역은 ‘복실복실이’ 김옥현과 ‘아킨토스’ 강재석 두 게이머로, 이들은 개방형 번역팀을 결성해 놀랍도록 빠른 시간 안에 거의 완벽한 한글화를 이뤄냈다. 결국 이 번역이 8월 27일 공식 한글판으로 인정됐으니, 재미있는 게임을 모두와 나누고 싶은 게이머들의 집착이 불러온 기적인 셈이다.

보통 게임 업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던 게임들은 십 수 년 이상 회자되곤 한다. 현대 FPS의 선조격인 <둠>, 연출과 스토리로 극찬을 받은 <하프라이프>, MMORPG의 초석을 닦은 <에버퀘스트>, ‘소울라이크’라는 장르의 기반이 된 <다크소울> 등이 그렇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 목록에 <디스코엘리시움>을 추가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10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 동안 <디스코엘리시움>의 스토리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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