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刊 아이러브PC방 10월호(통권 359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TRPG를 간단하게 말하면 테이블 위에서 보드게임처럼 진행하는 RPG다. 확률 계산이나 이벤트의 발생 등을 컴퓨터 대신 주사위를 던져 사람이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대부분의 TRPG들은 고유한 규칙과 설정이 있고, 우리가 흔히 접하는 컴퓨터 RPG들보다 역사가 훨씬 더 오래됐으며, 당연히도 인기 TRPG를 컴퓨터로 옮기려는 노력 역시 계속됐다.

‘컴퓨터 게임’이라는 개념이 탄생하고 십수년간 RPG 팬들은 자신이 플레이하던 TRPG 규칙들을 컴퓨터로 이식해왔다. 그 결과물 중에는 처참하게 몰락한 것도 있지만 완벽한 성공을 거둔 것도 있고, 현재까지 개발이 이어지고 있는 것도 있다.

근본 오브 근본 <던전앤드래곤>
1974년에 출시된 <던전앤드래곤(이하 D&D)>은 가히 이 분야의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널리 알려지고, 또 가장 많이 플레이된 이 작품은 ‘반지의 제왕’과 함께 현대의 다양한 판타지 매체의 기반이 됐으며, <D&D>를 기반으로 한 게임은 장르를 불문하고 워낙에 많아 단순히 이름만 나열해도 신문 한 면 정도는 우습게 채울 수 있을 정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비디오 게임 버전은 캡콤에서 개발해 국내 오락실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횡스크롤 액션게임 <던전앤드래곤: 타워 오브 둠>과 <던전앤드래곤: 섀도우 오버 미스테라>, 그리고 바이오웨어가 개발하고 삼성전자가 국내 유통한 <발더스게이트> 시리즈가 있을 것이다.

두 게임의 차이가 있다면 캡콤의 <던전앤드래곤>이 <D&D>의 세계관과 설정을 따온 것과 달리 <발더스게이트>는 <D&D>의 규칙을 따왔다는 점이다. 세계관이야 우리가 오늘날 상상하는 ‘판타지’의 전형이니만큼 매우 대중적으로 먹히는 소재이고, 규칙의 경우 <D&D>의 확장판이자 심화버전인 <AD&D> 버전을 따르고 있어 많은 플레이어의 호응을 얻은 바 있다.

한편 캡콤의 <던전앤드래곤> 시리즈는 오늘날 한국에서 <던전앤파이터>에 영감을 선사했으니, 어떻게 보면 PC방 인기 게임 <던전앤파이터>는 <D&D>가 없었다면 태어날 수 없었던 셈이다.

현대 판타지의 기원 <월드오브다크니스>
<D&D>가 고전 판타지의 전형이라면 오늘날 현대 판타지의 전형이 된 TRPG로는 <월드오브다크니스(이하 WoD)>가 있을 것이다. ‘트와일라잇’ 등 현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에 유독 늑대인간과 뱀파이어가 많이 나오는 경향을 눈치 챘다면, 그건 대체로 <WoD>의 영향이다. 또한 ‘과학과 마법의 대결’이라는 컨셉을 대중화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WoD>를 비디오게임으로 출시하려는 노력은 몇 차례 있었지만 그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트로이카게임즈가 2004년에 발표한 <뱀파이어: 더 마스커레이드 블러드라인(이하 블러드라인)>일 것이다. <메이지: 더 어센션>, <워울프: 더 아포칼립스>와 함께 <WoD>를 대표하는 세 개의 서플리먼트(확장팩) 중 하나인 <뱀파이어: 더 마스커레이드(이하 V: tM)>를 기반으로 하는 이 게임은 <V: tM>이 추구하는 ‘괴물이 되어가는 자의 인간성’과 ‘괴물이 되어가는 자와 괴물이 되어버린 자가 뒤섞인 사회에서의 정치극’을 잘 살려냈다고 평가받는다.

<블러드라인>은 비록 사양 최적화 문제와 다양한 버그로 당시에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지만, 차후 게임에 애정을 가진 개발자들 및 유저들이 사적으로 버그 수정 패치를 제작해 배포하고 PC 사양이 게임 구동에 문제가 없는 수준으로 올라가며 ‘제대로 완성됐다면 시대를 풍미했을 비운의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게임이다.

각 뱀파이어 클랜 간의 특징이 명확히 살아있고 퍼즐과 대화, 플레이어의 ‘선택과 결과’를 통한 자유도의 구현이 매우 훌륭해 오늘날에도 꾸준히 플레이되고 있으며, 이런 컬트적인 인기에 힘입어 대형 인기 게임사 패러독스인터랙티브가 판권을 구매, 현재는 후속작인 <블러드라인2>가 무려 15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개발 중에 있다.

총, 마법, 괴물, 컴퓨터 <섀도우런>
미국의 게임출판사 FASA가 1989년에 발매한 TRPG 규칙인 <섀도우런>은 매력적인 작품이다. ‘좋은 것’과 ‘좋은 것’을 합친 결과가 언제나 ‘더 좋은 것’이 되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섀도우런>은 해냈다. ‘사이버펑크’와 ‘판타지’의 결합은 모두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상승효과를 불러일으켰고, <섀도우런>은 오늘날 가장 널리 플레이되는 사이버펑크 배경의 TRPG 규칙이 됐다.

<섀도우런>의 배경이 되는 ‘마법이 돌아온 근미래’에서 플레이어는 뒷골목의 해결사인 ‘섀도우러너’가 되어 온갖 의뢰를 해결하고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이런 컨셉이 <섀도우런>특유의 세계관과 결합돼 당연하게도 수많은 게임사들이 <섀도우런>을 비디오게임으로 옮기고자 했지만, 빔소프트웨어의 1993년도 작품과 블루스카이소프트웨어의 1994년 작품, 컴파일에서 만든 1996년 작품, 심지어는 원작 개발사인 FASA가 직접 만든 2007년 작품까지도 원작 팬들의 비판을 받으며 그리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2013년 헤어브레인드스킴즈에서 <섀도우런>의 가장 성공적인 비디오게임 버전을 출시했으니, 그것이 바로 이름부터 당당한 <섀도우런 리턴즈(이하 리턴즈)다. <리턴즈>는 이미 죽은 친구가 보낸 메시지를 받으며 시작되는 ‘데드맨즈 스위치’ 시나리오를 시작으로 후속 시나리오인 ‘드래곤 폴’과 ‘홍콩’을 스탠드 얼론으로 발매하는 등 선전하며 세간의 호평을 받았다.

<리턴즈>에서 가장 큰 호평을 받은 부분은 바로 전투의 비중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원작 <섀도우런>에서부터 전투란 의뢰를 해결하는 중간에 딸려오는 ‘최대한 피해야 할 것’이었고,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불필요한 전투를 최대한 피해나갈 수 있다는 점은 그만큼 원작 팬들의 긍정적인 평가를 불러왔다.

화제의 ‘그 게임’ <사이버펑크 2013>
한편, 최근 수년 동안 거의 모든 게이머들의 뜨거운 감자였던 CD프로젝트레드(이하 CDPR)의 <사이버펑크2077(이하 2077)>이 TRPG를 원작으로 한 게임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2077>은 ‘R. 탈소리안 게임즈’의 TRPG 규칙인 <사이버펑크2013> 및 그 후속작 <사이버펑크2020(이하 2020)>을 기반으로 한 게임으로, 최초 발표 이후 7년여 간 수많은 게이머들의 애간장을 태워왔다. 그리고 출시 예정일인 11월 19일까지 계속해서 태울 전망이다.

비록 <데이어스 엑스>시리즈에서 추구하는 것과 같은 ‘이머시브 심’을 의도하고 만든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2077>은 ‘이머시브 심’을 이야기할 때 주로 요구되는 조건 대다수를 충족시키고 있다. <2070>은 <2020>으로부터 50여 년 뒤의 세계를 매우 뛰어난 수준으로 구현했으며, 현재까지 공개된 정보에 따르면 자유도 역시 매우 높은 것으로 보인다.

<섀도우런>이 마법과 결합된 형태의 사이버펑크를 이야기한 규칙이라면 <2020>은 사이버펑크의 ‘느낌’에 치중한 규칙이다. 해당 규칙의 원작자 마이크 폰드스미스에 따르면 “사이버펑크에서 중요한 건 기술이 아니라 느낌”이며 “어둡고, 불쾌하고, 비에 젖은 거리의 느낌과 록큰롤, 방황, 절망과 위험이 느껴져야”한다는 것이다.

게임은 수십 년에 걸쳐 완성된 사이버펑크 세계와 완벽하게 커스터마이징 가능한 주인공 캐릭터, 현세대 컴퓨터 성능을 한계까지 끌어올린 수려한 그래픽으로 출시가 되기 전부터 다양한 게임쇼에서 상을 쓸어 담고 있으며, <위쳐> 시리즈로 증명된 CDPR의 뛰어난 스토리텔링 능력이 있는 만큼 많은 게이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마치며
외에도 수많은 TRPG 규칙들이 오늘날 컴퓨터게임으로 재탄생 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수의 인기 TRPG 규칙들은 긴 역사만큼이나 세세하고 방대한 세계관을 이미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TRPG라는 장르 자체가 원래 플레이어들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꾸려나갈 수 있게 설계된 일종의 샌드박스이기 때문이다.

또한 TRPG의 규칙 역시 긴 시간동안 정립되어온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TRPG의 규칙을 따온 게임의 경우 다른 비디오게임에서 찾아보기 힘들면서도 완성도 높은 게임 시스템을 갖춰 새로운 재미를 선사할 수 있다.

새로운 재미를 찾아 떠난 게이머들의 종착지가 RPG의 조상이라는 점은 단순히 흥미로운 이야기만은 아니다. 유행이라는 것이 돌고 돌듯이, 게이머가 추구하는 재미 역시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게이머들이 어떤 재미를 추구하는지 파악하고 이를 충족시켜줄만한 것이 무엇이 있는지를 과거의 게임 유행에 비추어 알아낼 수 있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만족하는 게임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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