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刊 아이러브PC방 9월호(통권 358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아르바이트생들 사이에서 도는 유머 중 하나로, “카페 손님들은 가게 점원을 게임 NPC처럼 생각해서 남이 엿들으면 안 될 이야기도 서슴없이 늘어놓곤 한다”는 것이 있다.

<VA-11 Hall-A: Cyberpunk Bartender Action(이하 발할라)>와 <Coffee Talk(이하 커피톡>은 바텐더 혹은 바리스타가 되어 손님들에게 음료를 내어주고 이야기를 듣는 형식의 게임이다. 비주얼노블 장르에 타이쿤 장르를 섞은 형식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비주얼 노블’은 게이머에 따라 ‘이게 그림책이지 어떻게 게임이냐’는 비판을 받는 장르지만, 두 게임은 거기에 음료를 제조하는 미니게임을 섞고 ‘선택지’ 개념 대신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음료를 제조하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는 시스템을 채택해 게임성을 확보했다.

플레이어가 종업원의 입장에서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점에서, 두 게임 모두 여타 비주얼 노블들과는 다른 형태의 몰입을 제공한다. 비주얼 노블 장르에서 흔히 생기는 문제 중 게이머가 주인공 캐릭터에 이입을 못 해서 스토리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이 있는데, 두 게임은 이야기의 화자와 플레이어 사이에 제 3자 입장인 주인공을 완충제 역할로 넣음으로서 ‘부족하지만 보다 완만한 몰입감’을 제공하는 식이다.

비록 장르 특성상 소개글에서 스토리에 대해 언급하기는 힘들지만, 시스템과 분위기에 대한 간략한 설명만으로도 매력적인 게임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술을 섞고 삶을 바꿀 시간 <발할라>
베네수엘라의 인디게임 개발팀 Sukeban Games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해준 <발할라>는 제목 그대로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바텐더로 일하며 손님들에게 칵테일을 제공하는 게임이다. 플레이어는 모퉁이 골목길에 있는 등록번호 ‘VA-11 Hall-A’번 바에서 일하는 바텐더 ‘질 스팅레이’의 입장에서 사이버펑크 미래세계에 사는 여러 손님들의 주문을 받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줘야 한다.

사실 사이버펑크는 이미 다양한 매체를 통해 질리도록 다뤄진 낡은 장르고, 따라서 <발할라>는 장르 씬에서 수없이 되풀이해온(그래서 이제는 장르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작품이 아니라면 식상할 뿐인) 기술 발달과 인간 변화의 철학적 고찰 대신, 그저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사는 인물들의 드라마에 집중했다. 사이버펑크 특유의 철학적 고찰이 없지는 않지만 중점사항은 아니다.

‘스팀펑크’나 ‘디젤펑크’ 등의 장르와 달리 ‘사이버펑크’가 그리는 세계는 디스토피아에 가까운 경우가 많은데, <발할라>는 이 부분을 반영해 스토리 내에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담담하게 그려낸다. 기업국가 시대에, 전 국민은 기업이 살포한 감시용 나노로봇에 감염되어 있으며, 기업의 사병 조직이 도시를 순찰하고 시민을 폭행한다. 상당수의 동물과 식물이 멸종해 칵테일조차 술을 섞는 것이 아닌 화학물질을 즉석에서 합성해 만들어야 하는 것이 바로 <발할라>의 세계다.

<발할라>에서 드러나는 사이버펑크적 면모 중 하나는 신체적 기능과 쾌락에 대한 것이다. ‘버블검 크라이시스’와 ‘공각기동대’, ‘아키라’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개발자의 말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다양한 사이버네틱스 신체 증강장비와 유전자 시술 등으로 인간 육체의 한계를 뛰어 넘은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따라서 스토리 중 육체보다는 정신적인 면을 강조해 육체적인 성별을 크게 신경 쓰지 않거나 성적인 소재로 대화를 나누는 데에 큰 거리낌이 없다.

덕분에 <발할라>의 스토리는 양성애자와 이성애자, 동성애자가 모두 등장하는 동시에 성적인 농담도 거리낌 없는, 요즘 게이머들 식의 표현에 따르면 ‘EDUCATED’한 게임이 됐다. 그런 동시에 실제 게임을 구매한 게이머들로부터는 호평 일색이니,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이 녹아든 게임도 ‘재밌게’ 만들 수 있다는 증거 되시겠다.

게임 모티브의 대부분이 일본산 서브컬쳐 작품들인 만큼 게임 내에도 일본 서브컬쳐에 대한 패러디나 오마주가 자주 나오는 편인데, 애초에 장르 자체가 일본의 IT 기술 발전이 서양을 지배할거라는 두려움에서 탄생한 만큼 예로부터 사이버펑크 장르에는 동양적 요소, 특히 일본과 관련된 요소들이 다수 등장해왔기 때문에 크게 어색하지는 않다. 또한 패러디나 오마주의 대다수는 원본을 몰라도 게임을 즐기는 데에 지장이 없게끔 잘 녹아들어 있어, 일본 서브컬쳐에 큰 관심이 없는 게이머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게임의 핵심 요소인 ‘칵테일’에 대해 빼놓을 수 없는데, 주문받은 대로 음료를 내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음으로서 새로운 스토리를 볼 수도 있다. 예컨대 알코올 역할을 하는 물질인 ‘카모트린’의 비율을 높여 취하게 만든 다음 상대가 숨기고 있던 이야기를 듣는 등의 행동이 가능한 것이다. 이 때문에 <발할라>는 반복 플레이가 권장되는 게임이기도 하다.

공식 한글화는 되어있지 않지만 현지화 전문팀 ‘바다게임즈’의 임바다 매니저가 속해있던 유저한글화팀 ‘Team SM’이 제작한 고퀄리티의 유저 한글 패치를 쉽게 구해 다운받을 수 있다. 단 PC판 한정이며, 스위치 및 플레이스테이션 버전에는 적용할 수 없다.

따뜻함과 이야기가 있는 판타지 카페 <커피톡>
한편, 사실상 무정부상태에 빠진 베네수엘라의 사정상 끊임없이 발매 일정이 연기돼 온 <발할라>의 후속작을 기다리다 지친 팬들에게 따뜻한 코코아 같은 소식이 있었으니, 개발 단계에서부터 <발할라>를 의식했다고 공언한 비주얼노벨 <커피톡>이다.

<커피톡>의 배경은 ‘오크’나 ‘엘프’, ‘늑대인간’ 등의 종족이 실존하는 현대 사회로, 현실 사회에서의 인종 개념을 종족으로 바꾼 셈이라고 보면 된다. 다만 두드러지는 차이가 피부색 뿐인 현실 사회와는 달리 <커피톡>의 각 종족들 간의 차이는 훨씬 크고, 이러한 차이 혹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건들이 게임의 주된 이야기가 된다.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게임인 만큼 <커피톡>의 게임성에 대해 <발할라>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게임의 핵심 요소인 ‘음료 제작’에 있어서는 <발할라>보다 훨씬 더 다채로워졌는데, 음료 재료라고 해봤자 화학성분 5종이 전부이고 레시피도 전부 공개돼 있는 <발할라>와는 달리 <커피톡>은 보다 다양한 재료가 마련돼 있고 제조법 역시 플레이 중 힌트를 얻어 직접 알아내야하기 때문이다.

반면 스토리의 깊이는 다소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은데, 이는 결국 종족 간 갈등이라는 것이 그동안 판타지 장르에서 수도 없이 다뤄져 온 설정이기 때문이다. 판타지 장르의 역사가 얼마나 깊은지를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새로운 것이 없고 조금 얕을 뿐 재미없거나 불쾌한 스토리는 아니기 때문에 게임을 즐기는 데 큰 지장은 없다.

대신 스토리 이외에 즐길 거리가 있다는 것은 장점이다. 제한 시간 내에 손님이 요구하는 음료를 연속적으로 제시해야 하는 ‘무한 모드’와 추가 스토리가 포함된 만화가 게임 안에 포함돼 있으며, 게임 안에 등장하는 가상의 SNS를 통해 메인캐릭터들의 배경을 알 수 있다. 텍스트 분량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단편소설 콘텐츠도 있지만, 비주얼노블 게이머에게 텍스트 분량은 큰 단점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한편, 비주얼노블 장르의 고질적 문제인 ‘언어의 장벽’은 마찬가지로 바다게임즈가 참여한 수준 높은 공식 한글화로 해결됐다. 단순 직역이 아니라 문화의 차이나 언어유희 등도 충실히 번역된 만큼 게임의 스토리를 오롯이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두 게임 모두 ‘화려함’이나 ‘역동성’과는 거리가 멀다. 아무리 그 수준이 높다 해도 ‘도트그래픽’에 대한 호불호는 존재하고, 음료를 섞는 것 이외에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액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신이 피로할 때 마실 것을 한 잔 들고 편안한 마음으로 의자에 기대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이 필요하다면, 두 게임이 해결책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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