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刊 아이러브 PC방 2월호(통권 375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찰칵찰칵찰칵찰칵’ ‘다다닥 다닥다닥’ ‘또각 또각 또각’ ‘쾅쾅쾅!’
안녕하세요? 저는 키보드에서 신호 입력을 담당하는 부품인 키 스위치, 그중에서도 갈색을 띤 ‘갈축’이라고 합니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고 나서 조금은 한가해졌나 싶었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리그오브레전드>를 플레이하는 건방진 중딩, 아니, 중학생 손님 한 분이 방학이라고 하루종일 저를 두들기는 바람에 조금 피곤하네요.

전 형제가 많은데 우리 형제들이 내는 소리는 조금씩 다르거든요? 그런데 마지막의 쾅쾅 소리는 제가 낸 소리는 아닙니다. 5연패했다고 씩씩대며 PC방을 뛰쳐나간 저 조그만 중딩… 아니, 중학생 손님이 화가 났는지 저를 주먹으로 마구 내려치는 소리였어요. 자기 손 아픈 건 아는지 몇 번 두드리다 말긴 했지만, 까딱하면 제가 정신줄을 놓을 뻔했지 뭐에요. 제가 강해보이긴 해도 얼마나 섬세한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에요.
                                                                                                                                                                              / 독일 출신 키스위치 MR. MX Brown

가성비에 밀린 기계식 키보드 PC방 덕에 제2의 전성기
우리나라에 PC방이 1,000개, 2,000개에서 1만 개가 넘어가던 당시에는, 생각보다 키보드나 마우스에 대한 인식은 가벼웠어요. <스타크래프트>란 걸출한 게임이 전국 PC방을 지배하던 그때 당시에는 장비에 대한 중요성보다는 그저 게임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중요했거든요. 점점 다양한 게임이 저변에 퍼지고 장비에 대한 관심도 많아지면서, 기계식 키보드가 보편화된 것은 한 10년쯤 됐습니다.

사실 제가 100개쯤 장착되는 기계식 키보드는 1990년대 초반까지는 대부분의 컴퓨터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제품이었어요. 당시에는 알프스 선배, 후타바 선배가 기계식 키스위치의 양대 산맥을 이루셨었죠. 그러다가 가격이 엄청 싸고 저 대신 돔처럼 생긴 고무를 쓰는 멤브레인 키보드가 우리 선배들의 자리를 빼앗고 대세가 됐습니다. 우리 기계식 키스위치의 암흑기가 시작된 거에요.

2010년대 이전의 저는 생각보다 몸값이 좀 쎘는데, 이게 특징인 동시에 단점이 된 건 안타깝네요. 저는 싸구려 멤브레인 놈들과는 다르게 다른 친구들 대여섯, 많게는 열 몇 개와 동시에 일할 수 있거든요.(멤브레인은 얇은 플라스틱 막을 쓰기 때문에 동시에 너댓 놈 이상은 일을 못할 만큼 멍청해요) 대신 키 하나에 제가 하나씩 필요하다 보니 키보드 무게도 무겁고 가격도 비싸서 시장에서 점점 밀려나게 됐습ㄴㄴㄴㄴㄴㄴ니다. 아, 잠시 키가 눌린 것 같은데 저는 괜찮습니다.

다행히 중국 쪽에서 ‘야, 게임할 때는 멤브레인보다 기계식이 더 좋대’ 하는 소문이 게이머들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하면서 저의 제2의 전성기가 시작됐어요. 사실 비슷한 시기에 저와 비슷하게 생긴 형제들을 중국에서 엄청 싸게 찍어내면서 기계식 키보드 가격이 좀 저렴해진 게 주효했다고 봐야죠. 그 덕에 키보드랑 마우스, 헤드셋까지 묶어 ‘게이밍 기어’라고 아우르면서 시장이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커졌습니다.

키보드를 게이밍 기어로 확장시킨 장본인, 레이저 블랙위도우

찰칵, 덜컥, 타각, 가지각색의 목소리
PC방에서 가장 많이 나는 소리는 저를 두드리는 ‘찰칵찰칵’ 소리인 거 아시죠? 근데 그거 아시나요? 우리 형제들이 내는 소리의 특징은 키의 입력과는 큰 연관이 없습니다. 사용자가 키를 누를 때 제가 가진 금속 접점이 스위치 하단 부분의 접점과 맞닿으면서 컴퓨터 아저씨한테 신호를 보내는데요, ‘ㄱ’ 키를 눌러 컴퓨터에 ㄱ 신호를 보내는 최소한의 장치는 금속 접점과 스프링 뿐이에요. 그러니까 기계식 키보드를 누르면서 나는 다양한 소리는 사실 입력과는 관계없이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한다’ 하고 티를 내는 거라고 보시면 돼요.

조금전부터스페이스바가잘안눌리긴하는데저는 괜찮습니다. 아, 다시 되네요. 지금 ‘와드, 와드’를 되뇌이면서 저를 두들기던 이 중학생 손님은 파란 친구의 찰칵 소리가 시끄럽기만 하고 별로래요. 그래서 클릭 압력은 같은데 찰칵 소리만 없는 저같은 갈축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처음에 얘기한 것처럼 저는 친구들이 많아요. 처음에는 저랑 시끄러운 파란 친구, 경박스러운 빨간 친구, 과묵하고 묵직한 검은 친구 등 4개가 전부였어요.

몇 년 전부터는 녹색, 흰색, 회색, 은색 등등 친구들도 많아지고, 색은 같지만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도 많이 생겨서, 지금은 150개가 넘는 친구들이 생겼어요. 주인이 변태가 아닌 이상 하나의 키보드에서 다른 친구들과 만날 일은 없겠지만, 다들 제 갈 길 가고 있으니까 알아서들 열심히 일하다 갈 놈들은 가겠죠.

몇 년 전에는 금속이 아니라 빛을 이용하는 ‘광축’이란 경쟁자가 나타났는데, 이놈이 저와 달리 물이나 오염에 강하고 체력도 좋다고 소문이 나서, PC방의 제 자리를 죄다 빼앗아갔더라고요. 저는 빠릿빠릿한 건 자신 있는데 물은 굉장히 무서워하거든요. 슬프긴 하지만 더 나은 녀석이 대세가 됐네요. 그래도 아직 저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은퇴할 생각은 없고요, 다른 많은 친구들처럼 저도 묵묵히 제 할 일을 다 하려고 합, 잠깐만, 저기 사장님 저 왜 케이블 뽑아요? 어, 박스에 도로 넣네? 저 아직 아픈데 몇 군데 없는데요?? 저 수리받으면 아직 더 일할 수 있거든요?? 저기요!!!

수년이 지나면 친구들은 자연히 줄어들게 될 듯
PC방 대세 자리를 차지한 광축 스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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